소개

대이작도의 역사

이작도(伊作島)의 옛 이름은 이적도(伊賊島)였다 합니다. 서남해의 여러 섬처럼 고려 말에는 이작도가 왜구의 거점이었던 까닭입니다. <고려사> '변광수전(邊光秀傳)'에 "고려 말 왜구들이 이 섬을 점거하고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을 약탈하던 근거지라 하여 이적(夷賊) 또는 이적(二賊)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고려사>에는 공민왕 13년(1364년)에 현물세를 운반하던 배가 이 섬 근처에서 왜구에 의해 자주 습격을 받자 무장 전선 80여척을 동원해 수송케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소규모 해적 집단이 이작도를 은신처로 삼았다고 합니다. 또한 대이작도에는 조선시대 초(태종), 국영목장이 설치되고 말을 관리하는 목자(목부)가 들어오게 되었다 하는데 기록에 따르면 대이작도에는 59필의 국마를 54명의 목부들이 키웠다고 합니다. 그 후로 점차 사람들이 들어와 정착하게 된 것으로 추측되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서해와 옹진 지역의 다른 섬들과 같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섬으로 피난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대이작도 신석기 패총 1~5

대이작도에는 패총 5개가 있는데 2000년 국립문화재 연구소의 조사에 의해 대이작도의 패총1이 처음 보고된 유적입니다. 선착장에서 대이작도 패총2가 위치한 능선을 넘어가면 도장불이 나옵니다. 유적은 바닷가로 향해있는 나지막한 구릉 일대에서 확인되었습니다. 패총2는 선착장의 우측으로 보이는 이작횟집 뒷편 구릉일대에서 확인되었으며 패총3은 선착장에서 큰마을로 가는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댓골이라는 곳에서 확인되었습니다. 패총4는 댓골 우측 구릉에 위치해있고 패총5는 목장불에서 계남마을 가는 길, 고갯마루 우측 구릉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대이작도에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비의 모래섬, 대이작도

대이작도는 연안부두에서 44km 거리에 위치한 섬으로 인천에서 유일하게 해양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섬입니다. 대이작도에는 밀물 때는 잠기고 썰물 때는 드러나는 신비한 모래섬인 '풀등(하벌천퇴)'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절경을 조망할 수 있는 자연경관이 있으며 바다에는 소라, 굴, 꽃게, 피조개 등 수산자원과 저서생물(底棲生物 : 해저에 서식하는 생물을 통칭)이 풍부합니다. 서쪽 바람이 불어다 준 따뜻한 기온과 바다의 영향으로 여름은 선선하고 겨울은 온화해 많은 야생화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교역하던 배들의 피항지가 되었던 소이작도와 대이작도 사이 하트모양의 항구는 천혜의 지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자를 상징하는 부아산과 남자의 산 송이산 사이에 있는 장골습지는 섬에서는 보기드문 배후습지입니다.
무엇보다 대이작도의 아름다운 자연은 무분별한 개발로부터 섬을 지켜온 주민들의 애정과 노력이 모아진 결과입니다. 큰마을, 장골마을, 계남마을 3개의 마을이 있고 대이작도에는 섬을 아끼고 사랑하며 바다와 갯벌과 풀등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섬마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비의 모래섬, 대이작도

대이작도의 10경을 찾아보세요.

1경, 밀물 때는 잠기고 썰물 때는 나타나는 신비의 모래섬 풀등
2경, 부아산 정상에서 바라다본 하트모양의 해변
3경, 신선들이 걷는다는 부아산 구름다리
4경, 금빛 모래들이 반짝이는 작은풀안해변
5경, 산과 바다를 이어주는 큰풀안해변
6경, 계남마을 근처 고운 모래가 있는 띄넘어해변
7경, 굳센 기상이 보이는 남자의 산 송이산
8경,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둘얼래쪽의 최고령 암석
9경, 계남분교 총각선생과 섬마을 처녀의 사랑이야기가 있는 계남분교
10경, 부모님을 기다리다 바위가 된 형제의 전설이 깃든 오형제바위

작은풀안, 큰풀안 금모래 해수욕장
밀물 때는 잠기고 썰물 때는 나타나는 신비의 모래섬, 풀등
여자산 부아산과 남자산 송이산
계남분교 총각 선생과 섬마을 처녀의 사랑 이야기

산과 바다, 풀등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에
소박하고 따뜻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대이작도입니다.